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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명사

한국 과학문명의 역사 전개 알아보기

by outofmind 2024. 5. 12.

 

 

 

 2020년대 한국문명은 선진 의학과 의료 시스템 구비가 잘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한국 과학문명의 배경은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근간에는 하늘, 땅, 자연, 몸에 대한 지식이 2천 년 이상 전해져 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한국고대 과학문명의 시초를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주요 사건을 공유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삼국통일신라, 고려 등 시기에 발생했던 주요 사건을 바탕으로 역사 전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한국 고대 과학문명의 시초

한국과학문명은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지구상의 다른 문명권과 비슷하게 한국도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되었으며, 청동기시대가 펼쳐진 면서 수렵·채취시대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접어들었습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청동기를 기반으로 한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천여 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고조선의 멸망 이후에는 기원전 1세기 이후 철 기를 바탕으로 한 고대국가인 신라·고구려· 백제의 삼국시대가 7세기말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고대국가 문명을 이루면서 농업 생산과 공업 관련 기술, 무기 제작 기술, 종교 또는 지배층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문화 관련 기술,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기술 등이 사회의 모든 측면에 발현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토지 측량이나 곡물 수납 같은 농업, 건축·토목과 같은 테크놀로지를 가능케 한 수학 지식의 응용이 있었습니다. 이 시기 한국 고대문명에는 발상한 지역의 기후, 풍토, 식생 등이 반영되었고, 동시에 이웃한 중국문명, 더 넓게는 세계 문명상의 교류가 펼쳐졌습니다. 그 가운데 잔무늬청동거울이나 세형동검 같은 중국에는 많이 보이지 않는 한국의 독창적인 청동기가 출현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국 고대 과학문명을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유산이 있습니다. 5~6세기에 축조된 고구려 고분 가운데 90기 정도에 벽화가 그 펴져 있습니다. 이 고분벽화에는 그때까지 이룩한 한국의 과학문명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무엇보다도 농업의 신, 대장장이 신, 바퀴의 신 들이 눈길을 끕니다. 이처럼 과학문명을 신화로 표현하여 과시할 정도였으니, 문명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이 갑니다. 문자, 서책, 공문서도 보이고 갑옷을 입은 병사, 도로, 전차, 활과 칼 같은 무기, 사냥하는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문과 무가 골고루 갖춰진 모습입니다. 우주와 하늘, 해와 달, 별, 사신이라 일컬어지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같은 상상 속 동물, 식물을 비롯한 지상의 뭇 존재 들, 생명의 나무, 신선과 장생불사 등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내용을 통해 이 시기 한국의 고대 과학문명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벽화들은 당시 세계 회화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렇듯 드높은 예술성으로 인해 한국 고대 과학문명이 더욱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삼국통일신라의 과학문명과 일본으로의 전파

고대국가의 등장 이후 한국의 과학문명은 문자 전통이 이미 확립된 중 국의 문자와 그 문자로 기록된 제반 지식을 습득하여 자신의 문화를 표현해 내고, 더 나아가 학술, 문학, 예술,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기존 한국 문명의 틀을 넘어 중국을 위주로 한 동아시아문명의 일원으로 자리하면 서 비약하게 됩니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서 진한 시대를 거쳐 당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늘 땅 인간이 상호 연관된 사유체계와 기 음양오행 팔괘 등 세계의 구성과 변화의 기본 개념이 한데 엮인 과학이 발달했습니다. 고조선, 신라·고구려 백제 등 한국 고대국가의 문명도 이와 같은 과학의 유사체계와 개념을 수용, 공유하면서 자연에 대한 각종 탐구를 해나갔습니다. 쉽게 말해 중국에서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했는데, 한국에서도 그것을 빠른 시간 안에 추격하여 비슷할 정도로 올라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7세 기에 설립된 신라의 첨성대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중국처럼 번듯한 관측소를 설치하여 천체의 운행을 관찰한 것입니다.

이 시기에는 본격적인 과학활동이 이루어져 천문학, 의학, 수학 분야에 서 나라의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일을 담당하는 전문 관리직이 신설되었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 설립되었습니다. 학생들이 학습해야 할 교재도 편찬되었지요. 이런 교육, 관리 선발 시스템은 이후 조선 시대까지 천 년이 넘도록 줄곧 유지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삼국이 과학기술을 일본에 전파한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4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한국은 다른 문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국으로부터 과학기술을 습득하여 우리에 적합하게 만드는 한편, 이 러한 과학기술을 다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일본에 전파했습니다. 한국에 서 건너간 사람들은 일본의 고대문명 건설에서 여러 영역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들의 활약은 농사와 잠업, 저수지 축조, 교량 건 설, 기와 굽기, 청동제품과 철기 제품의 제작 등 각종 기술 분야와 천문학, 의학, 수학 등 과학 분야를 망라합니다.

고대 한국은 규모도 크고 형태도 다양한 중국의 과학기술을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 실정에 맞게 표준화했습니다. 그렇게 얻은 고대 한국 과학 기술의 압축된 결과물이 일본의 고대 과학문명 건설을 뒷받침했습니다. 이런 이중의 교류를 통해 한국은 한·중·일을 아우르는 동아시아과학 문명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불국토의 염원 속에 융성한 과학기술

성덕대왕신종, 석불사(석굴암)를 잘 모르는 한국인은 별로 없습니다. 외국인도 성덕대왕신종 소리를 듣고, 석불사의 불상을 본다면 그 아름다움 에 푹 빠질 것입니다. 4세기 한국에 들어온 불교는 수세기 만에 왕실과 지배층 사이에서 가장 유력한 종교가 되었고, 7세기 후반 삼국 통일 후에는 국교로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호국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습니다.

통일신라의 불교 예술품에는 귀금속 가공 기술, 동종 주조 기술, 석조기술, 토목건축 기술 등이 녹아들어 갔습니다. 특히 국왕과 나라의 수호 가 걸린 불교 사업에는 당시 최대·최고 수준의 기술 역량이 결집되었습니다. 8세기의 성덕대왕신종, 석불사가 대표적이죠. 신라의 불교 기술은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의 축조에서부터 2.5센티미터 정도의 감은사사 이함 안 풍탁에 입혀진 0.3밀리미터의 금 알갱이 나노 시공 기술까지 다 양하게 펼쳐졌습니다. 불교 기술의 놀라운 측면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을 비롯해 인쇄술의 창안과 혁신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고려 왕조 역시 불교를 국교로 내세웠습니다. 고려는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을 모두 모아 담은 대장경 편찬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최초로 간행된 10세기 송판대장경을 토대로 찍어낸 11세기 고려초조대장경, 13세 기 고려대장경이 그 결과물입니다. 고려가 처음으로 만든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염원을 모아 방대한 대장경을 판각한 것이며, 두 번째 고려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고려대장경은 8만여 경판이 별 흠집 없이 해인사에 현존합니다. 이는 오랜 보존이 가능한 판목의 선정, 목판 틀이 변형되지 않게 한 판형 제작, 공기의 흐름을 적절하게 제어하는 보관 방법 등의 놀라운 기술 덕분입니다.

더불어 고려대장경은 거의 오자가 없다는 국제적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 책의 비교 검토를 통해 정본을 확정하고, 새겨야 할 내용을 글로 쓰고, 글자를 새긴 목판의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 전체에 매우 엄밀한 교정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정밀한 서적 편찬 관리 기술의 일종으로 봐야 합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고려팔만대장경 보관장소
해인사 팔만대장경

 

 

고려의 4대 신기술

 고려의 과학기술 하면 고려청자와 금속활자 인쇄술이 떠오를 것입니다. 고려는 다원성이 두드러진 사회였습니다. 사상 면에서는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도 제도로서 유교가 지배적이었으며, 도교도 기층문화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지배세력은 혈통에 따라 서열이 결정된 신 라와 달리, 지방 호족 세력들이 연합해서 중앙 권력을 형성했습니다. 고려 귀족들은 중국의 귀족처럼 불교를 신봉하면서도 유교적 도교적 기풍을 함께 지니는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이라는 고려청자가 있습니다. 상감 운학문이라는 말에 드러나듯 여러 동그라미 안에 구름과학 무늬가 새겨져 있고, 아마 매화 등을 꽂기 위한 매병으로 제작된 청자입니다. 병의 우 아한 자태, 자기의 비취색, 새겨진 구름과 학의 역동성이 어우러진 명품입니다. 우아한 고려청자는 고려 귀족문화의 산물이었습니다. 한국은 낮은 온도에서 토기와 도기를 구워내는 오랜 기술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국으로부터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는 자기 제작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11세기 이후 고려 도공들은 유약의 개발과 처리 기술, 가마의 불꽃조 절 기술을 통해 비취색을 띤 청자를 만들어냈습니다. 게다가 기술혁신을 통해 자기에 무늬를 새겨 넣기까지 했습니다. 고려청자의 비취색은 '천하제일'이라는 중국인의 평가를 받았고, 명성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고려청자는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한국의 미를 뽐내는 대표적인 우리 문화유산입니다.

 직지심경은 금속활자로 찍은 현존하는 책중 최초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흙이나 나무로 활자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에서 먼저 시도되었지만, 청동을 재료로 하는 금속 활판인쇄술은 고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금속활자를 써서 제대로 인쇄하려면 활자의 제조와 함께 유성 먹, 종이 제작 기술이 뒤따라주어야 합니다. 고려는 이 분야의 기술 혁신을 통 해 금속활자 활판인쇄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내구성이 강한 금속활자로 활판 제작과 해체를 적절히 반복해 소량이지만 다종의 인쇄물을 찍어내는 데 편리했습니다. 이렇게 금속활자로 판을 짠 인쇄술은 중국보다 독서 인구가 적은 고려에 더 적합했습니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이후 한국문명의 지적 젖줄 구실을 톡톡히 했습니다. 고려의 신기술로는 최무선의 화약 개발과 문익점의 면화 도입도 매우 중요합니다. 화약 제조 비법을 알아내어 화약무기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 변화는 국토방위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면화 재배는 그전에도 어느 정도 확인되지만, 문익점이 중국에서 들여온 면화 씨앗은 훨씬 좋은 품질의 솜을 자아내는 씨앗이었습니다. 그 씨앗에서 손실을 빼내는 기술이 성공하면서 우리 조상들은 추운 겨울도 거뜬히 이겨내게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아직 품종과 기술을 갖추지 못한 일본에 면화를 수출해 막대한 수입을 얻기도 했습니다.

 

세종이 주도한 '과학혁명'

한국과학문명사에서 만나는 과학유산은 세종이 다스리던 32년간 가장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때 과학유산이 가장 많이 나 왔을 뿐 아니라 이전 시기에 비해 연구 수준과 성취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단시간에 질적으로 이루어진 획기적 변화를 혁명이라 말한다면, 이때의 비약을 세종시대의 '과학혁명'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 개창한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공부한 사대부들과 신흥 무인이 주도한 국가였습니다. 그렇기에 불교를 배척하 고 유교적 예치를 국가이념으로 선포했으며, 이에 따라 과학기술도 대대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유라시아를 제패한 몽골 제국의 통치 아래 중국과학과 이슬람과학, 서양과학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조선에서도 그 성과를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의 기획 아래 과학기술 연구가 집중적으로 치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세종은 그러한 대사업을 몸소 진두지휘하면서, 지혜의 집이라는 뜻의 집현전에서 인재를 육성해 과학혁명을 조직적으로 이루어냈습니다. 새 왕조의 정당화를 위해 관상수시를 내세우며 천명을 분명히 한다는 차원에서 역법과 시계 등 천문학을 깊이 연구하여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칠정산 내·외편, 자격루, 일성정시의, 앙부일구 등이 대표적 결과물입니다. 나라의 표준을 정하기 위해 약학을 통일하고, 도량형을 새로 만들고, 고유어를 표기하여 활용할 수 있는 한글을 창제했습니다.

지리학 분야에서는 나라 구석구석의 특산물 정보가 세종실록 지리지 안에 담겼습니다. 사람의 과학인 의학 분야에서는 국산 약재만으로도 온갖 병을 고칠 수 있는 향약집성방이 편찬되었고, 동아시아 의학 전체를 집대성한 세계 최대 규모의 의서인 <의방유취>가 편찬되었습니다. 검시 의서인 신주무원록을 편찬해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기술 분야의 업적도 있습니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국내의 전국적인 농사 경험을 수집, 정리한 농사직설을 편찬해 전국에 보급했습니다. 또 문의 진작을 위해 고려 때 창안된 신기술인 금속활자 인쇄술을 한층 더 발전시켰습니다. 아름다운 문자로 평가받는 갑인자가 그 산물입니다. 군사 장비를 위해서는 화약과 화포 제작 기술을 개량, 혁신하고 그 결과물을 총통등록에 정리했습니다. 이러한 과학혁명의 결과 이후 수백 년간 유교적 통치 기반이 확고해졌고, 조선의 과학기술은 각 분야에서 동아시아최고 수준으로 도약했습니다.

 

위기 속에서도 이어진 한국과학문명의 잠재력

15세기 세종 때 절정에 올랐던 과학기술은 오랫동안 국가통치에 활용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과학기술의 내적 외적 측면에서 적합성이 떨어졌습니다. 특히 16세기말 일본과의 전쟁, 17세기 중반 청과의 전쟁을 겪은 후 국가 체제가 크게 이완되었습니다. 과학기술 중 사용되지 않는 것이 적지 않았고,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도 많았습니다. 반면에 서양의 과학기술 등 선진적인 과학기술 지식이 중국을 통해 유입되어 새로 하고 학습, 반영해야 할 과제가 많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18세기에 개혁적인 영조와 정조가 세종시대의 영광 회복을 기치로 내세우면서 나라 세우기에 나섰는데, 세종 때처럼 과학기술 분 야가 개혁의 핵심을 이루었습니다. 그러한 개혁은 천문학, 지리학, 의학, 농학, 활자 인쇄술, 무기 기술 등 모든 측면에서 나타났습니다. 세종대에 이루어진 성과를 각각의 분야에서 최신의 지식을 반영해 업그레이드한 것입니다. 세종 때 보이지 않았던 과학기술 관련 사업도 펼쳐졌습니다. 영조는 청계천 바닥을 깊이 파서 쳐내어 물이 잘 흐르게 했고, 정조는 상업과 군 사적 목적이 결합된 새로운 개념의 수원 화성을 축조했습니다. 한양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잇달아 연결한 주교(배다리)를 만들어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민간 사대부들이 과학기술에 높은 관심을 기울였던 점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 시기 경제적으로는 상업과 소규모 민간수공업의 발달, 사회적 으로는 평민의 양반화를 통한 활발한 신분 상승, 종교적으로는 서학의 전래, 학술적으로는 청나라를 통한 서양과학기술을 포함한 지식의 팽창 등이 역동적인 사회상이 펼쳐졌습니다. 일각에서는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이해로서 수학과 박물학 탐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의 어류를 연구해 자산어보를 남긴 정약전의 활동이 그중 하나입니다. 실사구시라는 구호 아래 문헌, 역사, 문자, 사물 등의 내용을 고증한 사대부들도 있었습니다.

 과학기술이 민초들의 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점도 조선 후기 과학문명의 주된 특징 중 하나입니다. 17세기 이후 벼농사에서는 이모작과 이앙법이 도입되어 생산력이 크게 높아졌으며 시장의 발달과 함께 상업을 목적으로 한 채소, 인삼 등 특용작물의 재배가 활발해졌고, 외래 작물의 유입으로 생활의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고추의 도입으로 음식의 색깔과 맛이 달라졌고, 담배는 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호품으로 구실했으며, 감자와 고구마는 잦은 기근을 이겨내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지방 곳곳에 한약방이 설립되어 한약 이용 계층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온돌과 빙고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17세기 이후 전 계층을 대상으로 온돌의 일상화가 이루어져 겨우내 따뜻한 주거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냉장시설인 사설 빙고의 대유행으로 하절기 음식의 저장 보관이 수월해졌고, 생선의 이동 거리가 확대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17세기에는 관청에 소속된 천민들이 수공업 제품을 만들던 시스템이 붕괴되어 각종 수공업이 장인의 사적인 영역에 속하게 되면서 상업화가 촉진되었습니다. 이 시기 상업과 교통망의 발달로 유기(놋그릇), 모시, 도자기, 부채 등 지역 특산품이 전국을 대상으로 판매되면서 상업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19세기에 전통적인 한국과학문명이 이전 시기에 비해 가장 높은 수준에 오르고 가장 널리 시행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국제적 비교의 시각으로 보면, 한·중·일 동아시아 3국중 가장 뒤처진 모습을 띠었습니다. 1876년 개항은 전통과학기술을 고수하던 물리적 정신적 장벽을 무너뜨리며 나라의 존속마저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왕을 비롯한 개화파 관료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개명군주의 덕목이자 강병부국의 수단으로 근대 서양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가장 주목받은 분야는 실용적인 무기, 전신, 전차, 의료, 광산, 양잠 등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행정 부서, 학교, 사업 등이 전개되었습니다. 정부와 지식인들이 근대 과학기술을 소개하는 신문, 잡지도 발간되었습니다. 전통과학 중 제왕학의 위치에 있었던 시헌력 달력 대신 서양식 태양력을 공식 달력으로 삼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상으로 한국과학문명의 역사적인 시대별 주요 사건과 흐름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거북선, 금속활자 인쇄술, 온돌 등 세계에 자랑할 만한 대한민국의 과학유산이 많이 있습니다.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으로 대표되는 암울한 시기를 겪었지만, 선조들의 끈기와 잠재력으로 오늘날까지 현대 한국과학문명의 건설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한국과학 문명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될지 더욱더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