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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명사

전근대 한국의 천문학 제도

by outofmind 2024. 6. 24.

 

 

 천문학은 왕조의 위엄과 관련된 제왕의 학문이어서 국가가 독점적으로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유교에서는 천문학 관련 활동을 제왕의 중요한 업무로 인식되었습니다. 천문은 하늘에 나타난 현상으로 정치적인 점을 치는 활동이었습니다. 제왕은 천문뿐 아니라 일식·월식 예보나 농사 절기의 파악, 시간에 따른 일상생활의 길흉화복을 점치기 위한 역수, 기상 현상을 관측해 정치적 의미를 점치는 측후 등을 두루 보살펴야 했습니다. 천문, 역법, 측후 관련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누각 관련 기록은 통일신라 때부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제도에 대해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삼국과 통일신라의 천문학 제도

한국 고대국가에서 최초의 과학 관련 직업은 기원전 1세기부터 일자 또는 일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샤먼이 하늘에 나타난 현상으로 점을 쳤지만, 일자는 천문이라는 지식 체계에 기반을 두고 활동했다는 점에서 샤먼과 확실히 구별되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백제, 신라삼 국에서는 개국 때부터 이런 활동이 있었습니다.

 역법 전문가는 천문 관측 전문가보다 늦게 등장했는데 역박사라는 관직은 554년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역박사는 중국 수나라(581~618) 제도를 따른 것으로서 역법을 가르치는 전문 관리였습니다. 수나라에 설치된 역박사는 태사조의 가장 낮 은 품계의 관리로서 역학 생도의 교육을 맡았습니다. 역박사에 관한 기록이 역법 학습을 위해 일본에서 초청했다는 대목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역박사도 주로 교육을 맡았음이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나라 태사조에 역박사보다 품계가 높은 사력이 있었던 것처럼 백제에서도 이에 해당하는 전문 관직이 있어서 역법과 역서의 운용을 책임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의 천문학 제도

 

 일관이나 역박사가 속했을 관청은 7세기 전반 백제 무왕 때 완결된 관제에서 유일하게 확인됩니다. 이때 18부 중 하나로 일관부 설치되었는데 이런 천문관아가 이때 처음 생기지는 않았을 테고 기존 제도를 새롭게 편제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역박사도 일관부 소속이었을 텐데, 이로 보아 일관은 기능면에서 중국의 경 우처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천문 관련 사무 전반을 맡았을 것입니다. 일관 활동이 확인되는 고구려와 신라의 상황도 엇비슷했을 테지만 관련 자료는 없습니다.

전문적인 천문 관측을 위한 관측대도 축조되었습니다. 신라에서는 7세기 후반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별을 바라보는

[첨] 특별한 장소[대]라는 명칭의 시설을 설치했습니다. 첨성대는 아래쪽은 원형, 위쪽은 방형인 호리병 모양으로 높이가 19척 5촌 (약 9미터) 정도이며, 아래쪽 지름이 35척 7촌(약 5.2미터) 남짓이며, 위쪽 원지름이 21척 6촌(약 3미터) 남짓합니다. 상단부는 정사 각형으로 돌을 쌓았는데, 한 면이 6미터 정도여서 관측기구를 갖춰 천문 관측을 할 공간을 충분히 확보했습니다. 첨성대 중간 벽면에 사각형 문이 뚫려 있어 출입할 수 있으며, 출입구 정도까지는 속에 흙이 채워져 있으나 윗부분이 비어 있어서 사다리를 놓아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경주 첨성대와 유사한 형태의 천문대 구조물은 세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첨성대의 구조와 기능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천문대 사진
천문대 사진

 

물시계 시보 시스템

삼국 통일 이후 과학 관련 제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물시계 시보 시스템의 운영입니다. 718년(성덕왕 17년) 신라에서 처음으로 물시계 담당 관리로 누각박사 6인과 서리직인 누각사 1인을 둔 누각전을 설치하여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라의 물시계 시보는 중국보다는 한참 늦고 일본보다도 50여 년 늦었습니다. 718년은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지 50주년이자, 신라 3보 중 하나인 황룡사 9층탑을 완공한 해로 국력이 최전성기 첨성대 해석의 역사와 신라시대의 천를 누렸던 때입니다. 이 누각전을 설치하여 신라는 고대 동아시아 천문학 제도의 3요소인 천문 관측, 역법과 역서의 활용, 물시계 시보를 완비했습니다.

 

누각전

 누각전은 국가 행정 조직에 속해 있어 왕궁 내 관직인 천문박 사공봉복사와 구별됩니다. 749년(경덕왕 8년)에는 천문박사 1명을 두었는데 이는 일자 또는 일관으로 부르는 전문직을 본격 제도화한 정식 관직명이었습니다. 언제 설치되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공봉복 사가 있었는데 관원 수를 따로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공봉이라는 말은 왕에게 직속되었다는 뜻이며 복사 복서 점을 담당한 전문 직종이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에서 누각전은 국가 행정 조직을 다룬 잡지에 실려 있지만, 천문박사·공 봉복사는 왕궁 내 기관을 다룬 잡지 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구성이 삼국사기 편찬 당시의 자료 부족 때문인지 실제로 천문기관이 기능적으로 단일화되지 않아서인지는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수당이나 이후 고려의 제도처럼 천문 관련 기관이 왕궁 안, 왕궁 밖으로 이원화된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고려 왕조 이후의 천문학 제도

고려에서는 천문, 역수, 측후, 각루 등의 일을 더욱더 중시해 왕조 내내 시행했습니다. 초반기에는 신라 제도를 따랐지만 976년(경종 원년) 이전 어느 때인가부터 이원적인 천문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이때부터 이전의 사천 단독이 아닌 성격이 비슷한 태 목감과 태사국을 같이 운영했습니다. 두 기관은 모두 당나라의 태복서와 태사국을 본받은 것으로 이는 고려 왕조가 당의 운용 체제를 전면적으로 채택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두 기관을 둔 데서 고려 왕조가 당의 제도를 온전히 본받고자 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천자국과 비슷한 활동을 추 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직의 변동과 상관없이 두 천문 관청의 관리는 보통 일관으로 불렸으며 두 기관에 속한 관리가 모두 일식의 예측 같은 천문 관측, 역서 제작, 누각의 관리, 풍수. 복서를 비롯한 각종 음양술수의 응용에 관한 일을 담당했으며, 두 기관사 이의 인사 전환이 빈번했습니다.

 

천문학 관성의 변화 

 그렇지만 1275년(충렬왕 원년) 고려가 원의 부마국으로서 원에 종속된 후 천문학 관청의 성격과 조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해에 두 기관 중 하나인 사천감(태복감, 사천대)은 원의 종속국임을 반영하여 기존 천자국의 관청 이름과 구별되는 관후 서로 바뀌었습니다. 1308년(충렬왕 34년)에는 관후서와 태사국을 합쳐 서운관으로 일원화했습니다. 1356년(공민왕 5년) 이후 원의 세력이 약화하여 반원 개혁의 일환으로서 옛 문종 대의 이원적 천문 제도의 회복을 조치한 것을 보면, 충렬왕 때의 서운관 일원화 가원의 직접 지배와 관계된 조치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통합과 분리, 재통합 등 몇 번의 변동이 있었습니다. 이런 잦은 변동은 고려 말 다른 관제에서도 발견되는 일반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조선 왕조에 들어서도 천문 기구의 명칭을 서운관이라 했고, 활동적인 측면에서도 그다지 차이가 없었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나라의 전근대 천문학에 대해서 시기별로 알아보았습니다. 삼국과 통일신라, 고려왕조까지 천문에 대한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전근대 천문학은 천문학적 관측과 예측뿐만 아니라 의식과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이러한 풍습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에 깊이 뿌리는 내리고 있으며 현대에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