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루에도 일정 관리를 위해 수십 번씩 쳐다보는 것이 달력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서양의 그레고리력입니다. 그레고리력은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정한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는 1896년 이후 사용했으니 그레고리력을 쓴 지는 백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문명사에서 선조들이 어떻게 달력을 이해하고 현시대까지 이어졌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6세기 중반에 세종대왕의 명으로 천문학을 연구한 것이 과거의 달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칠정산은 조선시대 천문학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로 조선의 천문학적 지식과 기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중요한 천문학적 표인데 이런 칠정산에 대해서 상세하게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천체 이해를 기반으로 한 역법
칠정산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최초의 달력입니다. 칠정산은 15세기에 만들어진 후 약 2백년간 최고의 달력이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력은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달력은 천체를 이해해야만 만들 수 있습니다. 천체를 알려면 관측기구, 관측을 담당하는 사람, 관련제도, 그리고 이렇게 얻은 지식을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특히 일식, 월식 같은 현상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역사 기록상으로는 백제의 '원가력' 사용이 가장 앞서고, 고구려에서는 '무인력'이라는 달력을 썼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사용한 달력은 '선명력'입니다. 선명력은 당나라에서 822년에 만든 역법인데, 통일신라 후기에 들여와 1309년까지 무려 4백년 넘게 썼습니다.
고려는 수시력을 받아 왔지만 원리를 깨치기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고려를 대표하는 천문학자가 갖은 애를 썼지만 수시력으로 일식과 월식을 완벽하게 예보하는 법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298년 충선왕의 명에 따라 수학 계산을 빨리 할 수 있는 계산표를 만들었습니다. 이 계산표는 훗날 조선의 천문학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하는데 커다란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조선 세종 때에는 서울을 기준으로 일식과 월식을 정확히 예보할 수 있는 체제가 마련되었고, 그 결과 칠정 산이 탄생하였습니다.
독자적인 역법 칠정산의 탄생
칠정산이 왜 필요했는지 그 전의 상황을 고려해야합니다.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아주 오랫동안 자체적인 달력을 만들지 못하고 중국의 달력을 가져다가 썼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지 때마다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 달력을 받아 왔습니다. 이때 가는 사신을 '동지사'라고 불렀죠. 동지는 해가 가장 짧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날부터 해가 점점 길 어집니다. 옛사람들은 동지 다음날부터 양의 기운이 시작된다고 여겨서 동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지사를 파견한 겁니다.
중국의 달력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중국 황실에서 기념하는 사항이 적힌 황력이었고, 또 하나는 농사짓는 데 필요한 사항을 적은 민력이었습니다. 동지사가 가면 중국의 황제가 황력 10권, 민력 100권을 하사 하는 행사를 치렀습니다. '천자의 나라'인 중국이 이웃 나라들에게 '문명'을 내려주는 일종의 의식을 치른 겁니다. 이로써 '하늘을 관찰하여 백성에게 농사짓는 데 긴요한 시간을 알려준다'는 오래된 유교 이념을 실천했습니다. 이를 '관상수시'라고 합니다.
달력 만들기는 여간 어려운게 아닙니다. 이 과업을 누가 맡았을까요?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432년 세종은 총명한 학자들을 뽑아 연구하도록 시켰는데 어명을 받은 관리들은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세종은 10년에 걸친 연구 끝에 그들은 당시 가장 정확했던 수시력의 핵심을 다 이해했고, 수시력을 기본으로 한 명나라 대통력의 문제점까지 모두 짚어냈습니다. 같은 책을 가지고 공부하면 서도 중국보다 성취 수준이 더 높은 결실을 가져왔습니다. 그 결실이 우리에게 딱 맞는 역법 칠정산이었습니다.
칠정산의 수학 공식
칠정산을 이름 그대로 풀면 '7정을 계산한 수학책'이란 뜻입니다. 왜 역법에 이런 이름이 붙은 걸까요? 7정은 해와 달에 오성(목성, 화 성, 토성, 금성, 수성)을 더한 7개 별을 말합니다. 오성은 달력 만들 때 중요성이 떨어지지만 옛 천문학에서는 꽤 중시됐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던 음양오행의 자연관에서 오성이 중심을 이룬 시기였습니다. 음양오행은 천지, 만물, 자연, 인체의 온갖 현상을 이해하는 기본 틀이었습니다. 해는 양의 기운이고, 달은 음의 기운입니다. 합쳐서 '음양이라 하죠. '오행'은 목, 화, 토, 금, 수의 다섯 기운을 뜻합니다. 이처럼 음양오행에서 오성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별이었습니다. 그리고 별을 뜻하는 7성호이 아니라 7정이라 한 이유는 별들의 운행이 임금의 정치와 관련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역법인데도 역해 대신 계산한다는 뜻의 산맥을 쓴 건 중국을 의식해서 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중국을 섬길 수밖에 없어도 정신적으로는 당당한 문명의 주체가 되겠다는 다짐을 드러낸 것입니다.
실제로 칠정산은 철저하게 계산 수치만 보여주는 수학책과 같습니다. 칠정산에 적힌 수치들은 현대 천문학으로 얻은 수치 와 거의 완전히 일치합니다. 칠정산 수치들은 구면 천문학이라는 서양 천문학을 알아야 풀 수 있다는 겁니다.
칠정산을 토대로 정묘년의 일식과 월식을 계산한 결과는 칠정 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에 담겼습니다. 조선은 외교용으로는 중국 명나라에서 받아 온 대통력을 계속 썼지만 실제 예측에는 이렇게 칠정산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날짜와 숫자가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공식과 풀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결과만 밝혀져 있습니다. 서양 수학과는 다른 방법으로 푼 것이 분명한데 계산한 값은 일치합니다. 칠정산에 숨어 있는 수학 공식은 한마디로 미스터리인 거죠.
일반적인 역법의 원리에 대해 먼저 알아보면 달력 만들때 가장 중요한 건 '1년의 길이'와 '한 달의 길이'입니다. 1년은 지구가 태양 궤도를 도는 공전 주기이고, 한 달은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공전 주 기와 같습니다. 이 두 현상을 잘 결합하여 1년 열두 달을 질서있게 나누는게 달력의 핵심이죠.
칠정산은 해, 달, 날과 관련된 상수(변하지 않는 일정한 값)를 정하고, 해 와 달의 궤적을 정하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고, 절기마다 28개 항성의 뜨고 지는 시간을 정하고, 오성 각각의 궤적을 정하고, 사여성의 궤 적을 정했습니다.
칠정산의 아쉬운 한계
칠정산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세종은 중국 수시력의 조선판을 생각하는데 그쳤습니다. 비록 칠정산 외편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역법인 경향력의 원조가 되기는 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이후 국내에서 2백여년 동안 잘 사용되었지만 17세기 이후 서양 천문학에 견줄 만한 발전은 없었습니다. 세종이 칠정산을 모든 나라가 따르게 하겠다는 꿈을 가졌다면 아마 천문학으로 세계에 유명한 나라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조선을 넘어 전 세계에 혜택을 주는 과학이 탄생하지 않았을까요?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과거 우리나라 천문학의 연구의 결과물인 칠정산에 대해서 안내해드렸습니다. 칠정산은 천체 연구를 통해 기반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달력이였고 그 당시 수학 공식을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분명 칠정산의 아쉬운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볼 수 있고 조선의 천문학적 지식과 기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중요한 천문학적 표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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